덕암 칼럼 창공을 나는 새가 되어
2026.07.20 14:58:48

사람이 그어놓은 38선, 그 철조망을 두고 남과 북이 갈라진 지 81년, 위도 38도라 해서 38선으로 명명된 이 분단의 경계선은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설정한 군사 분계선이다.
우리 땅인데 남이 그어놓은 이 선은 어쩌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장벽 일수도 있다. 그러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다시 치고 박고를 거듭하다 생긴 선이 휴전선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그어진 선, 처음에는 38선이었다가 나중에는 휴전선이 됐다.
위치도 비슷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정해진 이 선을 군사 분계선이라 한다. 전쟁 당시 유엔군이 소극적인 반면 국군은 적극적으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일명 고지전이라는 피의 사투를 벌인 끝에 강원도 쪽은 속초, 양양, 까지 북진했지만 서쪽은 개성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휴전을 맞이했으니 그 선이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다.
양쪽 길이 238km, 그 길이에 폭은 남북 각각 2km의 비무장 지대가 설정되었으니 이른바 DMZ라 한다. 한때 영화 “웰컴투 동막골”소재로도 유명세를 탔던 38선은 평화롭던 마을이 두 동강 나고 어느 날 갑자기 철조망이 쳐지면서 남과 북이라는 분단의 방향성 철옹성이 세워진 것이다.
6.25 동란 때나 이후 김일성 주석이 생존할때만 해도 북한은 남한보다 더 경제력이 좋았다. 등따습고 배부를 수만 있다면 인민의 천국이라 자부하던 시절이었다.
전 인민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고 호언장담한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 체제가 시작되면서 북한은 하락을, 남한은 상승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 이어진 대기근과 정치적 실책으로 약 48만 명에서 350만 명이 아사, 즉 굶어 죽었다는 추정통계가 대외적으로 알려졌다.
이런 기근은 실제 1994년부터 시작된 것인데 인간의 본능상 아사자가 이 정도라면 목숨이 겨우 붙어 있는 사람은 더욱 많았다는 산술적 추정치가 나온다. 기근의 여파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무신 짓인들 못하며 그런 상황속에서도 호의호식하며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사람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견기다 못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 어떤이는 잡혀오고 무사히 건넜더라도 중국 공안이 한 번씩 소탕 작전을 벌이는 탓에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을 사람들이 수십만 명으로 늘었다.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고 탈출 러시는 현재 약 35,0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제 3국을 경유해 한국에 정착했다. 그 중 여성이 72% 남성이 훨씬 적었다. 한창 탈북이 붐을 이룰 2009년에는 한해 약 2900명이 한국땅을 밟았고 2019년을 정점으로 급격히 즐어들었다.
2026년 현재 탈북민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어렵사리 한국에 정착한 이들 중에는 국회의원도 4명이나 배출했고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다.
탈출이라는 극단적 단어가 이들에게는 도망자, 내지 현실을 도피한 사람들로 인식될 선입견을 바꾸기 위해 새터민이라고도 하고 이탈 주민이라고도 불린다.
이탈, 위취를 벗어났다고도 들릴 수 있는데 실제 그들 중 상당수를 접해보고 북한,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의 접경지역인 함경북도 출신의 새터민의 실화를 들어보면 고난의 행군이라는 명분이 아사로 죽어가는 국민들에게 배가 고파도 버티라는 사실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은 그동안 1670년 현종 때 경신대기근을 겪었다. 인구가 적었던 그 시절에도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인육까지 먹었다고 기록된 내역을 참고해 볼 때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짐작 가고도 남는다. 이처럼 자연재해와 정치적 실정이 겹치면 어떤 비극을 낳는지 역사적 기록을 참고 해 볼 일이다.
뿐일까 숙종 21년, 1695년 을병대 기근으로 5년 만에 전 국민의 20%인 141만 명이 굶어 죽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할 때 남한은 한창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재임시절 한국은 자유가 방종으로 이어질 만큼 승승장구했다.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가 한류열풍을 타고 K 바람을 일으켰다. 북한 이탈주민들이 처음 겪어본 자유의 생소함은 자본주의 단점도 적용됐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공정해야 할 이들에게 동정론도 보태졌다.
사회단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들을 복지나 구제 대상으로 여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과정에 여론이 제도권으로 진입되면서 정해진 날이 북한 이탈주민의 날이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한 이날은 전국적으로 기념행사가 개최됐다.
1997년 7월 14일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정해진 이날은 통일부 주관으로 다양한 행사가 치러졌다. 북한을 탈출한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태어난 죄이고 다른게 있다면 그들은 북한의 처참한 현실을 겪어본 것이며 남한사람들은 들은 것 외에 겪어보지 못했다는 차이다.
겪은 자와 들은 자, 이제 결론으로 돌아가 이들이 겪은 북한의 현실이 공산주의이고 자유 대신 감시를, 배급체제 속에 제한되었던 무한 경쟁이 경제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 논리가 눈부신 발전이 이들에게 생소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어떤 식이든 통일이 된다면 북한에서 직접 태어나고 자라고 성인이 되어 남한으로 정착한 이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 단점을 직접 체험하였기에 북한과의 대책없는 합류보다 그들의 이념, 사상, 모든 생활풍습까지 공감대를 이뤄내야 할 교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통일이 된다는 가정하에 이들의 정착, 성공을 위한 노력에 법률적 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 어렵사리 탈출한 이탈 주민들이 몇 푼의 정작 지원금으로 나머지는 알아서 살라하는 것이 동포애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북5도민 출신들의 전언에 따르면 실향민의 아픔은 명절때나 북녘에 남겨진 가족의 생일이나 기일에 더욱 애절하다고 한다. 특히 이탈주민들이 남긴 가족들은 통신과 서신 그 어떤 생사확인의 통로조차 없다. 통일부가 조심스레 나서야할 숙제이기도한다.
그리고 대북송금도 되는 현실속에 가족에게 보내는 돈까지 브로커들에게 절반이나 떼이는 부작용도 정부가 나서야 할 일 중 하나다. 분단의 아픔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남한의 분열이다. 이념, 지역감정, 가족간의 단절 등 다양한 현실이 분단보다 더욱 삭막해진 남한의 현실이다.
오늘도 북녘 하늘을 향해 한 마리 새가 되어서라도 상봉을 간절히 바라는 이탈 주민들에게 이 글이 위로와 격려가 되길 바란다.
덕암 김균식
심수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