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한식날
2026.04.06 15:52:02

한식날은 조상의 묘를 찾아 잡초를 제거하고 평소 고인의 삶을 회자하며 산 자들이 망자를 기리는 날이다. 매장문화가 화장장으로 변하면서 이제 그런 풍경은 점차 사라지겠지만 그나마 장례조차도 간소화시키는 작금의 변화를 보면서 저출산이 불러올 비극을 모두가 공감해보자.
문명의 발달이 불러온 정신문화의 추락이 문제다. 뭐든 돈 이면 안되는 게 없고 사람보다 돈이 우선이며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학의 발전이 비인도적인 측면으로 발전하면서 효율성만 강조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AI나 로봇의 등장이 불러온 인간 가치의 추락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연장의 욕심은 평균수명을 100세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다.
살아남아 제사지낼 사람도 없는데 언제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잡초를 깎는 수고를 한단 말인가. 길어봐야 십 수년 뒷면 조상 묘도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고 어쩌다 납골당 주변 추모공원을 찾아 성냥곽같은 유골함 아파트의 유리를 어루만지다 오는게 전부일 것이다.
지금 상태라면 장례를 치러도 문상객이 없다.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대폭 줄어들었다. 상조 업계 전문가들의 전언에 따르면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현상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향후 10년 정도만 지나면 장례문화 자체가 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직 까지는 부의금을 모아 장례를 치르고 상조회사에서는 고인의 장례절차나 추모의 분위기가 엄숙히 지켜질 수 있도록 전문성을 더하지만 문상객이 없고 유족이 장례 치를 경제적 여유나 방법을 모른다면 과연 망자의 가는 길은 살아생전보다 더 험하지 않을까.
결혼식은 미리 알고 준비 하지만 장례는 예고 없이 치러야 한다. 당사자도 북망산천 가는 길을 미리 알 수 없지만 유족들도 미리 준비할 여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것이 인간의 죽음이다.
갈수록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현실, 남은 유족이 있어야 장례를 치르는 것이고 매장을 해야 무덤이 생기는 것이며 그래야 잡초를 제거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오늘은 절기상 한식 날이다. 아직은 공동묘지나 추모공원 주변이 교통정체로 복잡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상을 모신다는 것, 자라는 아이들이 볼 때에도 산 교육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산자들은 적어도 부모를 모시고 기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망자의 혼령 또한 자손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땅속의 흙이되어 영면하신 고인이 무슨수로 자라는 후손들을 볼 것인가.
사람이 살면서 밥만 먹고 배설만 한다고 사람은 아니다. 먹고 자고 싸는 것은 동물도 하는 본능이다. 불과 물을 다루고 문자와 언어로서 의사소통을 하는 만물의 영장이 조상의 죽음에 대해 귀찮아하거나 소홀히 대한다면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님도 아니고 아버지의 정기를 받고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난 것이지 핏덩어리로 태어나 지금의 각자 모습이 있기까지 저절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들이 보거나 타국인이 봤을때도 그러하다. 자기 부모도 소홀히 하는 인간성이 무슨 이웃을 살피고 나라를 위할 것이며 자식을 낳아 인재로 양성할 것인가.
좁은 국토에 매장문화가 발달하면 환경적으로나 국토 이용에 관한 문제점도 피할 수 없지만 이제 달라지는 매장문화에 따라 한식날은 날일 뿐인 기록으로 남게 돨 전망이다.
향후 24년 뒤 2050년 한식날 묘지는 그 누구도 찾지 않는 평범한 야산일 뿐이며 성묘객 없는 무덤은 풀이 자라고 봉분도 무너져 비석조차 나뒹굴 것이다. 적어도 한 나라, 한 시대의 변천을 이뤄낸 주인공들이다.
후손에게 돈만 남기면 돈벌레가 될 것이고 부동산을 남기면 당대에는 잘 산다 하지만 선조들은 잊혀질 것이며 책을 남기면 도서가 양식이 되고 얼과 혼을 남기면 찬란한 정신문화의 발전을 이룩한다. 사람이 살면서 하나 둘씩 변하고 달라질 수 밖에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잊혀진 것이 너무 많고 앞으로도 간직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문명의 발달과 인식의 변화로 인해 무형의 자산을 잃고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도 잊고 동짓날 팥죽도 잊어간다.
연예인 생일은 알아도 부모님 생신은 모르며 개똥은 봉투를 갖고 따라다니며 우리 애기 응가 했냐며 치워 주지만 부모는 침만 흘려도 더럽다고 피한다.
갈수록 초고령화로 수직 상승하는 대한민국의 인구분포도로 인해 젊은이들이 애써 번돈으로 노인들이 기대어 살아야 하는 시대가 온다면 과연 그때도 한식날 산소를 찾아갈 것인가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면 부모가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성묘나 산소에 잡초 제거하러 갈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안 죽고 영생 하는게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이라도 조상을 추모하는 예의와 후손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지켜야 하는게 맞는 것이고 그래도 후손들이 보고 배울까 말까 하는 것이다.
일년에 한번 돌아오는 한식날만큼이라도 자신을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가 생전에 고마웠던 마음을 전하고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에게도 훌륭한 가정교육이 될 것이다. 이제 장묘문화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그리고 수목장이나 유골을 구슬이나 도자기로 만드는 방법까지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일부는 바다나 강에 뿌리기도 하고 가진 재력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명당을 찾아 묘를 쓰는 경우도 있다. 생로병사의 굴레는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죽음이 끝이라면 어찌 국립묘지가 운영되는 것이고 불가에서 윤회를 논하고 예수가 영생을 전제로 믿음을 강조할 수 있을까. 우리네 인간은 길어야 100년도 못하는 삶속에 온갖 오만과 건방과 자만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
일부 철학가나 종교인이 신과의 교감을 추구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삶이고 일반인들의 삶은 태어나서 20년은 몸만 키울 뿐이고 70살이 넘으면 살아도 열정이 사라진 채 남을 삶을 영위할 뿐이다. 그렇다면 삶다운 삶은 50년 중 15년 자고 10년 먹고 25년이 전부인데 그 짧은 삶을 사는 것조차 동물보다 못하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태어나서 한 줌의 재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촌각이라하고 큰바위 위에서 승려가 승무를 추는 동안 그 바위가 다 닳는 시간을 1겁이라한다. 억겁의 세월앞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하루살이 보다 못한 것인지 느낀다면 조상을 섬기는 일 만큼 고귀하고 갸륵한 일이 없다.
덕암 김균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