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칼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2026.10.27 14:52:29

어제는 47년 전 궁정동 안가의 총성으로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날이었다. 1961년 육군 소장으로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던 박 전 대통령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 제6·7·8·9대에 이르기까지 장기 집권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선포했으나 1979년 10월 26일 사석에서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의 언쟁 도중 그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사망했다.
이후 33년만인 2012년 박정희기념관이 건립되었고 홍준표 전 대구시장 때인 2024년 대구시가 동대구역 광장에 수 억원의 예산을 들여 높이 3m 규모의 박정희 동상을 세웠다. 조기 대선 상황에 홍 전 시장이 사퇴하면서 기념사업이 사실상 중단됐고 동상만 남았다.
국가 철도공단은 지난해 1월 대구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구시가 동상을 설치하기 전 광장 소유권이 있는 공단에 사전 검토·승인을 받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다.
이로 인해 지난 25일 대구시와 지역 시민단체인 박정희 우상화 사업 반대 범 시민운동본부’가 성명을 통해 박정희 동상 소송이 국가 철도공단의 항소 포기로 종결된 것에 대해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역사 정의를 외면한 판결과 사태의 결말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친일과 독재를 표상하는 박정희 동상은 대구의 랜드마크가 아니라 국내외적 망신거리로 두고두고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며 정부와 여당이 행정적, 입법적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동상은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임에도 어떡하든 끌어내리려고 하는 단체들의 목적이나 취지는 무엇일까. 다시 50년 전 과거로 돌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대 헐벗은 대한민국을 국가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전 국민이 하나 되어 기적처럼 일으킨 나라 아니던가.
지금 이념이나 사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당시 코흘리개 꼬마였거나 철없는 개구쟁이였다. 교과서는 물론 언론, 방송, 영화까지 죄다 좌파사상으로 도배되다 보니 보고 배운게 오로지 투쟁과 분노 뿐이다.
애써 성공한 사람을 부르조아 취급하며 적개심을 만들어내는 사고 방식은 자신이 노력하는 것보다 부자의 부를 깎아 나눔으로서 배급사회의 합리화에 젖어 있을 뿐이다. 박정희가 독재자고 일제 치하에서 동료를 밀고한 배신자라는 말이 맞다 치고서라도 왜 박정희의 장점은 외면하는 것일까.
그럼 박정희 정권이 서슬퍼런 군부독재라 치고 재임기간 동안 뭘 했을까. 지금의 이재명 대통령과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떤 모습이 차이가 날까.
먼저 호패로 신분을 알리던 조선시대 이후 국민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릴 표식이 없었다가 박정희 재임기간 동안 주민등록법을 개정해 18세 이상 전 국민에게 앞뒤 여섯 자리씩 모두 12자리의 고유번호가 부여됐다. 지금 독자분들이 갖고 계신 주민등록증의 출발은 박정희 때 부터였다.
그리고 전 세계가 창찬을 아끼지 않는 의료보험 제도도 박정희 정부의 성과였다. 노동자가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그러다 노태우가 전 국민으로 확대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제대로 마무리 됐다.
그리고 난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그린벨트로 묶어 자연 보존의 기반을 만들기도 했다. 치산치수라 했던가. 박정희 정부는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국내 최대 저수용량을 가진 다목적댐인 소양강댐 건설에 나서 1973년 준공했다. 이후에도 안동댐과 대청댐 등 물 부족 국가의 어려움을 댐으로 해결했다.
박정희의 안목은 늘 수 십년 뒤를 예상했다. 댐 건설에도 반대가 만만찮았다. 제주도에서는 감귤 생산을 포기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식량 증산 대신 수익성 높은 감귤을 적극 장려하라고 감귤 증산 5개년 계획이 수립됐고 감귤 재배는 급성장했다.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말할 나위도 없이 국가 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겼으며 그 효과는 준공 이후인 2026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는 야당, 지식인 등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해진 사회와 함께 단군 이래 최대 토목 공사라고 불렸고 근대화의 성공적 진전을 상징하는 사례가 됐다.
이 밖에 1970년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낸 정책으로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고치기, 전기공급 및 전화 보급, 도로 미화사업, 위생 관념 확립 및 미신 타파 등이다 미래를 예측해 110V에서 220V로 승압한 전류가 지금 대한민국의 위상을 얼마나 높였는지도 알아야 한다.
새마을운동으로 전국적인 생활 환경 및 국민 위생 개선, 농로 등의 인프라 구축이 됐고 한국 농촌에서 초가집은 이 시기에 거의 사라지게 된다.
어디 그 뿐인가 1961년 자동차 공업발전법을 만들어 완성차 수입 금지, 국산화 정책, 수출 산업화 정책 등과 함께 자동차 산업을 활성화 했다. 결과 1975년 국내 최초 자체기술로 개발한 포니를 출시한다.
그 밖에 부동산 취득제한, 거주자격 심사강화, 세무조사 등의 화교정책으로 한국의 화교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 화교들은 부동산 취득 등 부의 축적 수단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한국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외국으로 대부분 이주했다.
지금처럼 외국인들이 무차별 입국하도록 비자를 완화하거나 없애는 정책과는 상반된다. 특히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전쟁 파병을 요청받고 파병에 합의한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군사원조, 경제원조를 받은 것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파병 요청을 외면하는 것과도 많은 비교를 하게 된다.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는 실제로 있었다. 80살 이상 되신 분들이 겪었던 굶주림은 1971년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다수확품종인 통일벼 재배가 시작되어 1974년 쌀 생산량이 3000만 석을 돌파, 쌀 수입을 끝냈으며 1975년 마침내 쌀 자급이 달성됐다.
이 또한 배고픔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나라가 무슨 돈이 있었을까.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인해 얻은 자금이 경제발전에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1966년에 무려 12.4%라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일청구자금을 종잣돈 삼아 포항제철, 고속도로, 항만, 전기에 투자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일궈 냈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었던 과정은 제쳐놓은 채 일본과의 굴욕외교를 했다고 난리다.
중화학 공업 분야에서도 1967년 포항종합제철 설립과 1968년 착공을 이끌었다. 이후 1974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를 준공하고 1983년 건조량 기준 세계 1위 기업이 되었다. 최초의 지하철도 박정희 정부 시대의 산물이다. 1974년 서울역~청량리구간 1호선을 개통한다.
영부인도 박정희 못지 않게 나라살림에 애착이 많았다. 육영수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박정희에게 직언을 하여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그럼에도 영화 암살자(들)을 통해 가족간의 이간질이나 박정희 업적 지우기에 열을 올리는데 일조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정작 김혜경 여사가 골프에 정신이 쏠려 시도 때도 없이 치다가 야당 의원한테 적발되어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흑백 테레비젼 속에 흘러 나오던 노래 나의 조국이 귀에 들리는듯하다.
"백두산의 푸른정기 이땅을 수로하고" 그리고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이제는 다시 듣지 못할 2곡의 노래는 참으로 열심히 살았던 1970년대 국민들의 근면성을 대신하는 전주곡이었다. 지금처럼 돈줄테니 가만 누워서 표만 찍어 달라고 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덕암 김균식 .
심수연 기자






